64 지난 2주간 경수는 백현의 마니또가 된 기분이었다. 마니또의 필수 조건은 선한 마음이 바탕이 된 치밀한 염탐이었다. 경수는 반쪽짜리 마니또였다. 파악은 했지만 좋은 걸 가져다 주진 못했다. 한 발짝 물러나니 백현이 아닌 백현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. 그게 신기했고, 그 영역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백현의 일면을 포착하는 순간이면 새삼 백현과 자신이 다름...
51 오해의 메커니즘은 비슷했지만 결과물은 달랐다. 오해를 미뤄둔 숙제처럼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하나 뜯어서 그 모양을 살펴보는 사람도 있었다. 전자는 백현이었고 후자는 경수였다. 형? 세훈이 물었고 경수는 느릿하게 거기 말고 저기 앉자, 하고 대꾸했다. 백현은 연주는 아랑곳하지않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. 변백현 너 뭐해! 연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...
* 저녁부터 비가 온다길래 우산을 챙겨나간 날이 있었다. 언제나 그랬듯 천천히 걸었다. 기다리는 사람이 없기에 늑장을 부렸다. 누구에게나 유한한 시간이 그럴 때면 꼭 나를 빗겨 가는 것 같아서, 나는 자주 멈췄다. 이름 모를 들풀을 한참 관찰하곤 학명을 추리하기도 했고, 낯선 꽃을 발견하면 내 멋대로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. 가는 도서관을 자주 바꿨다. 가...
43 세훈은 대학교를 싫어했다. 고등학교도 지겨웠는데 또 학교라니. 다들 가라니까 일단 가고 보는 곳이 아직 남아있다니. 그다음엔 군대겠지? 이 미친나라. 끌리는 학과를 택했지만 좋아하냐고 물으면 아리송했다. 동기들은 착했고 친해지긴 어려울 것 같았다. 각종 뒤풀이는 어느 쪽이 더 재미없는지 겨루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. 특별한 양아치라 술을 뗀 건 아니었는...
*변백현 지금은 새벽 세 시. 투박한 편지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. 서두를 오십 번 넘게 고쳤어. 보통 편지는 시작이 쉽고 중간부터 곤란해지기 마련인데, 처음부터 어렵더라. 해야 할 말을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? 사실 이 기획은 기만이야. 이 편지는 너에게 도착할 일이 없거든. 우선, ‘너’라고 지칭하는 네가 현재 없고, 설사 이 편지를 쓰는 동안 네가...
* 소란한 침묵이었다. 반찬으로 나온 우엉조림은 짜고 썼다. 밥은 질었고 나는 물기가 많은 밥을 좋아하지 않았다. 신디가 나와 변백현의 눈치를 봤다. 아까부터 우리 셋 중 젓가락질은 제일 열심이면서 식판이 그대로였다. 오늘 별로네요. 음식에 관한 넋두리였는데 나와 변백현의 상황에도 어울렸다. 난 이상한 애가 됐고 변백현은 이상한 애 때문에 동료들의 빈축을 ...
만약에 악어새가 中 인정해야 한다. 난 녀석에게 저당잡혔다. 아주 여러모로 말이다. 녀석이 크로커다일 매장의 적장자길래 악어자리를 내줬을 뿐이지 전적으로 내가 악어새가 되어 녀석의 쫄따구처럼 굴어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. 녀석은 내게 전보다 거침없이 들이댔다. 반장, 반장(이때의 반장은 덜 묵직한 톤이었다.)하고 하도 부르는 통에 반으로 시작하는 글자는 ...
* 홈에 있던 글을 수정했어요. 오랜만에 읽으니 손대고 싶더라구요. 내용상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어요. 나는 너를 경외해 1. 산 송장 아 살아는 있구나. 막막한 오후였다. 핏기 빠진 손 마디가 앙상했다. ‘살아’가 아니고 ‘살아는’ 이었다. 숨이 붙어있기만 했다는 소리다. 너희 엄마가 산 송장 같다며 울었다. 나는 울지 않았다. 송장이 아닌게 어디야. 산...
33 “그럼 이렇게 개념화하기로 한 거죠?” 스터디룸의 매직은 경수가 잡았다. “여기, 비혼주의를 ‘내면화’한다. 이것도 좀 걸려요. 교수님이 또 애매하다고 하실 것 같은 느낌.” “관련 논문 찾아볼게요.” 경수가 차분히 팀플을 주도했다. 뱉은 말은 지키는 경수라는 걸 조원들도 어렴풋이 파악했다. 경수가 관련 논문을 찾아 본다고 하면 정말로 찾는 것이었다....
* 내 슬픔엔 구멍이 많았다. 아마도 사람들이 날 외면하는 건 그 속으로 빠질까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고, 어렴풋이 생각했다. * 구부린 허리를 폈다. 주변이 고요했다. 변백현은 사라지고 없었다. 아까와 같은 공간이었다. 언제 소란스러웠다는 양 감쪽같은 침묵.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. 이불에서 텁텁한 냄새가 났다. 내가 흘린 눈물의 흔적일지도 몰랐다. 문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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